[수필] 각선미

[수필] 각선미

2014. 4. 20. 19:00

脚線美 / 金 時 憲                                                                                           

“인생은 방황의 연속입니다.”고 말하는 철학가가 있다. 
방황에서 벗어난 사람도 많이 있다. 석가나 예수 같은 사람, 신부나 목사 같은 사람, 
스님은 평생을 두고 산 속에서 평화와 안정을 얻으려고 노력한다.

방황에서 영원한 평화를 얻자면 방황의 싹을 완전히 끊어야 한다. 
싹이 남아 있으면 그곳에서 또 방황이 시작된다.

성철 스님이 입적하고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하는 말이 유행처럼 나돌았다. 
어려운 말이 아닌데도 그 뜻에 대해서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나도 이런저런 생각을 해 보았다. 산을 보고 산이 아니라 하는 사람이 있고, 
물을 보고 물이 아니라 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그런 말이 생겼으리라.

또 하나 ‘돈오(頓悟)’라는 말이 잡지에 자주 나왔다. 
돈(頓)의 뜻을 알고 싶었다. 
옥편에 ‘갑자기 돈’으로도 읽는다고 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돈오는 ‘갑자기 깨닫는다’가 된다. 생각하다가 생각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화끈 깨달음이 온다는 뜻인가.

어느 날 나는 지하철을 타고 인사동에 갔다. 
거기 조계사 근방에 작은 책방이 많이 있다. 
문이 열려 있는 어느 가게에 발을 들이밀었다. 
불교에 관계되는 올망졸망한 상품이 가득 진열되어 있고 그 사이에 책도 나란히 꽂혀 있었다. 
성철 스님이 썼다는 『돈오요문(頓悟要門)』을 읽고 싶었던 것이다.

가게 안쪽에 얼굴은 볼 수 없고 덩치가 상당히 큰 스님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상관하지 않고 책을 보아 나가는데 “무슨 책을 찾으십니까?”고 스님이 물어 왔다. 
쓸데없는 간섭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사실대로 말했다. 
스님은 “『돈오요문』을 찾으시는 것을 보니 책 좀 읽으셨네요.” 한다. 
나는 그를 돌아보지도 않고 “아닙니다.”고 내뱉듯이 말했다.

“제가 책 하나 소개해 드릴까요?” 그는 또 말을 걸었다. 
그제야 돌아보았다. 
뚱뚱한 체격에 얼굴이 원만했다. 
부드러운 표정을 보내면서 “성철 스님의 책으로 『영원에의 길』이 좋습니다. 
최근에 읽은 것으로 가장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면서 가게 주인을 향해 
그 책 한 권 달라고 말한다. 
주인은 이미 40대로 보이는 침착한 표정의 여인이었다. 
문고판 같은 예쁜 책을 받아 나에게 건네 준다. 
일방적인 행동에 거부감이 좀 왔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책 뒤편의 가격표를 보고 2,000원을 꺼내서 주인에게 건네려 하니까, 스님이 “아닙니다. 
제가 드리는 것입니다.” 한다. 
책을 받아야 할 이유가 없고 기어이 돈을 내려니까 그는 기어이 내 손을 뒤로 민다. 
기분 좋다 해야 할지, 기분 나쁘다 해야 할지 어중간한 감정으로 
다시 책꽂이 쪽으로 눈을 돌렸다. 
『돈오요문』은 없었다. 
가게를 나오려고 스님을 향해 “감사합니다.” 하니까, 
“손님, 시간 있으십니까?” 하고 묻는다. 
그렇다니까 “저 하고 차 한 잔 해도 되겠습니까?” 한다. 

신호등을 건너 작은 골목길을 들어간 곳에 전통 찻집이 있었다. 
스님이 들어가니까 키 큰 여인이 바쁘게 일어나서 공손히 합장을 한다. 
아는 사이 같았다. 

스님은 나에게 자기 소개를 했다. 
합천 해인사에 있다는 것, 
때때로 서울에 와서 바람도 쏘이고, 친구 스님도 만난다는 것, 
한 번씩 오면 책방에도 들르고 실컷 걷다가 돌아간다는 것 등이었다. 

몇 가지 이야기 끝에 나는 ‘돈오’의 뜻을 물었다. 
그는 물음에 대한 대답은 않고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한국에 스님이 많지만 옳게 깨달은 사람은 몇 사람 안 됩니다. 
성철 스님도 다는 못 깨달았습니다. 더구나 나 같은 사람은 돌중입니다. 
먹을 것 다 먹고, 볼 것 다 보고, 이야기할 것 다 하고 다닙니다. 
예쁜 여인이 앞에서 오면 보통 사람과 같이 쳐다보고 싶어집니다. 
각선미가 좋은 여인이 앞에서 걷고 있으면 남몰래 시선이 다리에 가 머뭅니다. 
조금 다른 게 있다면 ‘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이 반사적으로 날아오고 
그제야 다른 데로 눈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것뿐입니다. 
다른 사람보다 좀 빨리 눈을 돌린다는 것… ….”

스님의 이야기는 길었다. 
한 시간은 지나갔으리라. 
스트레스를 풀려고 했는지 모른다. 
스님은 시계를 보더니 다방 주인에게 종이를 달라고 한다. 
무엇인가 적더니 내게 내밀면서 “제가 오면 그 서점에 꼭 들릅니다. 
손님도 나오시는 일 있으시면 물어 주십시오. 
인연이 닿으면 또 만날 수 있습니다.” 쪽지에는 그의 법명이 쓰여 있었다. 

스님은 의자에서 일어선다. 나를 향해 정중히 합장을 한다. 
나는 어물쩍하다가 손을 내밀었다. 
그도 따라 손을 내민다. 
두툼한 손바닥에서 신뢰 같은 감정이 전달되어 온다. 

스님과 헤어지고 지금은 일년이 된다. 
그가 준 쪽지가 어디 있는지도 잊었고, 그 서점에 또 나가야 할 일도 없었다. 
길에서 그를 만난다 해도 얼굴을 기억해 낼 자신도 없다. 그러면서 ‘그것뿐입니다. 
다른 사람보다 좀 빨리 눈을 돌리는 것’이라고 한 한마디는 사라지지 않고 
나의 머리 속에 현재도 분명히 남아 있다. 
왜 ‘돈오’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고 
각선미 이야기만 하다가 갔을까 하는 의문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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