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삶, 그리고 사랑의 속도 / 박범신

[수필] 삶, 그리고 사랑의 속도 / 박범신

2014. 4. 20. 18:46

삶,그리고 사랑의 속도 / 박범신

층계를 올라갈 때 나는 보통 두 계단씩 성큼성큼 오른다. 
바쁠 때만 그런 게 아니다. 시간이 지천으로 남아돌 때도 그렇다.

성미가 급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급하고 느린 것, 예민하고 단순한 것,

비관적이고 낙관적인 것, 음울하고 활달한 것 따위,

기질적인 성정은 평생 변하지 않는다.

내 경험주의에서 보건대 그렇다는 것이다.

아니 변하기는커녕 나이들수록 오히려 잠재된 기질은 더욱 적나라해 진다.

특히 이성적인 관계가 아닐수록 이런 경향이 심하다. 
가령 오래 묵은 부부 같은. 

삶의 관성엔 속도가 있다. 
제 아무리 잘났다고 뽐내봐도 시간의 에스컬레이터에서 벗어나는 인생이란

있을 수 없다.

삶의 공간이동이 알고 보면 원심력을 따라가는 「떠남」과

구심력을 따라오는 「회귀」의 사이클에서 영원히 자유로울 수 없듯이,

시간으로부터 완전히 놓여나는 삶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문제가 있다면 눈금으로 표시되는 시간은 언제나 일정한데,

우리가 삶을 느끼고 살아내는 속도는 개인개인마다 각각 다르다는 사실이다.

어떤 사람은 십년을 다른 이의 이십 년이나 삼십 년처럼 느끼고 살 수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그 반대일 수도 있다.

물론 시시때때 한 개인이 삶을 살아내는 속도도 다르다.

배가 아주 고플 때 식당으로 걸어가는 속도와 별로 배가 고프지 않을 때

식당으로 걸어가는 속도가 같을 수는 없다.

그러나, 깊은 밤 홀로 고요히 앉아 뒤돌아보면 자신이 살아온 삶의 관성이

대강 어느 속도였는지 짐작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평균치를 떠올려볼 수도 있다.

구체적으로 내가 익숙하게 알고 지내는 누군가와 비교해보면 더욱 또렷해진다. 

아내는 느리고 나는 빠르다. 
아내는 느릿느릿 뜨거워지고 나는 빨리빨리 뜨거워진다.

식는 것도 마찬가지다.

문제를 해결해 가는 속도도 그렇고, 사랑의 속도도 그렇고,

일을 해내는 속도도 그렇다.

우리가 캠퍼스 커플로 연애하던 삼십여년 전이나,

쉰이 넘은 지금이나 이점은 전혀 변한 바가 없다.

예를 든다면 기차를 타기 위해 플랫포옴으로 나갈 때,

차시간이 한참이나 남았는데도 나는 재빠른 직진보행이고,

아내는 기차가 곧 떠나겠다며 기적을 연거푸 울려대도 결코 뛰는 법이 없다.

아내에겐 이번 기차를 못타면 다음 기차가 또 있지만,

나에겐 이번 기차가 언제나 막차와 같다.

밥을 먹을 때나 쇼핑을 할 때나 여행을 떠날 때나 마찬가지 속도가 적용된다. 
부부란 동행자라 했던가. 
동행한다는 건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는 것일 터이다.

속도를 맞춰야 동행이 가능하다.

아내와 나는 동행자라는 점으로 보면 매우 불행한 한쌍이다.

어느 쪽에서든 속도를 줄이거나 늘리지 않는 한 동행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자기 속도보다 더 빨라지는 것,

자기 속도보다 더 느리게 걸어야 하는 것,

일시적으론 가능할지 몰라도 수십 년간 그럴 수는 없다.

스트레스가 엄청날 것이다.

이치가 그러하니 속도를 상대편에 맞추어 동행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난센스다.

어느 한쪽이 스트레스를 쌓아가면서 계속 상대편의 속도에 맞추어 걷는다는 것은

사랑이라기보다 구속이요 억압이다.

그런데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구속과 억압을 사랑으로 착각하고 살아간다.

사랑은 헌신이라는 판에 박은 듯한 계몽주의적 슬로건도 거기에 일조 한다.

물론 연애시절, 어느 일정한 시간 속에선 구속과 억압도 행복일 수 있다. 
도대체 사랑이라는 것이 어디 눈에 보이는가. 
눈에 보이지 않으니 확신할 아무런 근거도 없고, 확신할 수 없어 아득할 때,

그의 구속과 억압은 곧 사랑으로 환치되어 보인다.

그렇지만 일시적 환상일 뿐이다.. 환상은 계속되지 않는다.

더구나 결혼하여 아들 딸 낳고, 아파트 늘리고, 텔레비전 키우며 살다보면

환상은 더욱 더 발붙이고 은거할 곳이 없다.

결혼생활이란 리얼리즘이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연애는 소설이고 결혼은 역사다.

역사보다 소설이 재미있는 것은 거기에 픽션이 가미되기 때문인데,

픽션이란 알파라고 불러도 좋은 일종의 미지량을 가리킨다.

사람이란 너무도 불확실하고 너무도 가변적이므로, 사실의 철저한 조합과,

그 조합을 근거로한 추론 속에만 머물러 있는 게 아니다.

어떠한 사실, 어떠한 이성으로도 설명되지 않는 사람의 오묘하고 수상한,

사실 밖으로 삐어져 나온 부분이 바로 미지량이다.

연애는 이 미지량이 허용된다. 그

러나 함께 솥단지를 걸고 함께 날마다 벌거벗고 자야하는 결혼엔

불확실한 미지량이 허용될 수 없다.

거기엔 생활이 있으며, 생활은 그들을 둘러싼 사회와 거미줄처럼 관계 맺고 있고,

최종적으론 제도의 뒷받침을 받는다.

그러므로 결혼과 동시에 미지량의 낭만성은 거세된다.

원천적으로 일탈은 있을 수 없다.

그들은 사랑한다고 말하고 사랑한다고 확신도 느끼지만, 「

삐어져 나온 부분」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제도적 전제가 있기 때문에

이미 사랑으로부터 떠나버리는 것이다. 결혼제도에 함유된 숙명적 모순이다. 
그러하니, 속도의 문제가 남는다. 
시간은 차츰 연애시절의 낭만적 미지량을 걷어내고, 서로를 사실적으로 보게 만든다. 그 리얼한 시선 속에서 상대편의 속도와 내 속도는 적나라하게 비교되고,

그 비교 때문에 싸움이 일어난다. 
「신혼 초부터 길을 잘 들여야 돼」 
사람들이 곧잘 하는 말, 길들인다는 것은 곧 속도의 길들이기다.

내가 삶을 느끼고 삶으로 나아가는 속도에 상대편의 속도를 맞추려는 투쟁이다.

신혼시절은 연애가 연장되기 때문에 이 투쟁의 결과는 자못 희망적일 때가 많다.

어떤 경우엔 아내가 남편의 속도에 맞추고,

또 어떤 경우엔 남편이 아내의 경우에 맞춘다.

맞춤복을 입었을 때처럼 잘 맞춘 순간 그들은 짧은 행복을 느낀다.

그러나 이내 행복하지 않은 시절이 찾아온다.

연애의 미지량에서 벗어나면 곧 속도를 맞춰주어야 하는 쪽에서

스트레스를 받기 때문이다. 스트레스를 계속 받으면 결국 폭발하고,

폭발은 위기를 만든다. 아내와 내가 하는 부부싸움의 대부분은 바로 이것이다.

지금쯤은 서로의 속도에 맞추는 것도 연습이 잘 되어

기계적으로 척척 들어맞을 법도 하건만, 어림없는 희망이다.

피차 상대편에게 아무런 긴장도 갖고 있지 않아 속도의 차이는

나이들수록 더욱 늘어난다.

가령 외식하러 나갈 때, 결혼하고 삼십여년이 다 된 지금도,

나는 아내를 기다리다가 화가 나서 외식의 행복감을 다 잊는다.

겨우내 거실에 들여놓은 화분을 언제 밖에 내놓을 것인가를 놓고

언성을 높일 때도 있다.

내가 화를 낼 때 아내는 비로소 내가 왜 화를 내는지 생각하기 시작하고,

내가 화해하고자 할 때, 아내는 토라져 상처받고 있는 중이다.

심지어 밥상을 마주 하고 앉아서도 내 쪽에서 숟가락을 내려놓고 일어설 때,

아내는 「이것 좀 먹어 봐」특정 음식을 내게 내밀어준다.

「먹어 보래도」한마디 더 하면 곧 싸움이 된다. 

돌아보면, 평생 함께 살았으면서도, 나는 나의 속도로 살고 아내는

아내의 속도로 살아왔다고 느낀다.

어깨를 나란히 하고 함께 걸어왔다는 건 착각이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살아온 셈이다.

내가 빠르니까 아내는 주로 나의 뒷모습을 보았을 것이고,

나는 아내의 뒷모습을 거의 본 적이 없다.

왜 꼭 같은 속도로 걸어야 사랑이라고 느끼는지 모를 일이다.

그 하나의 착각 때문에 아내와 내가 서로 으르렁대며 입어 온 상처들을 생각하면

지난 시절이 아득해진다. 
속도를 맞추는 것이 사랑이랄 수 없다. 
삶을 대하는 개인의 기질적인 속도는 이미 어른이 되기 전에 결정되어 있다.

신혼 초에 머리를 자를까말까 일주일씩 고민하는 신부는

할머니가 되고도 여전히 일주일씩 고민하며,자를까 말까,수십번 묻고 묻는다.

그때마다 화를 낼 수는 없다.

사랑은 상대편에게 내 속도에다 맞추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희생해 상대편의 속도에 맞추어주는 것이 아니라,

서로 상대편의 속도를 이해하는 일이다.

속도가 다르다는 걸 이해하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걸을 때, 오히려 그를 볼 수 있다.

평생 나보다 느린 속도로 내 뒤를 쫓아온 아내는

나의 이면에 깃들여진 결핍감의 정체를 잘 알고 있을 터이다.

스트레스를 계속적으로 쌓으면서 상대편의 속도에

불철주야 맞추려는 헌신적인 사람이 있다면, 방법을 바꾸라고 하고 싶다.

그것은 헌신이 아니다. 
왜 내가 당신 속도에 맞추어야 해요? 
이렇게 물을 일이다.

시비를 걸지 않고 어떻게 나의 속도를 상대편에게 알릴 수 있겠는가.

꼭 나란히 걸어야 한다는 것은 결혼이 가진 제도적 횡포에서 오는 가짜 명제이다.

그는 그의 속도로 가게 두고, 그의 뒷모습,

혹은 앞모습에 깃들여진 결핍을 이해하라.

그래야 진실로 동행자가 된다.


-2001 여성동아 5월호 권두에세이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수필] 염소  (0) 2014.04.20
[수필] 각선미  (0) 2014.04.20
Don Mclean - Vincent(Starry Starry Night)  (0) 2012.12.24
세번째 시 - 아이히  (0) 2012.11.18
두번째 시 - 헤르만 헤세  (0) 2012.11.18